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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본성을 가리는 온갖 쓰레기를 버려라.



깨달음은 주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에 ‘주장하는 자’가 사라져야하기 때문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아야만 내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그대는 ‘나는 생각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생각한다.’라는 두 번째 말 또한 틀렸다.
생각이 깨달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생각은 깨달음과 아득하게 동떨어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이 그대를 진흙탕 속에서 뒹굴게 한다.
생각은 그대의 눈을 가려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생각은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생각은 왜곡의 체계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오쇼, 제 생각에 저는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사랑이 생각의 부분인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저는 사랑에 빠진 것을 느낍니다.’라고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제 생각에 저는 빠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사랑조차 하나의 생각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랑이 생각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오직 느낌이 될 뿐이다.

여기 세 가지의 층이 있다.
첫 번째는 생각이고, 두 번째는 느낌이며, 세 번째는 존재이다. 생각, 느낌, 존재.

그대는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생각보다 높은 차원이다.
사랑은 생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다.
사랑을 느낄 수는 있지만 사랑을 생각하는 불가능하다.

깨달음에 관해서는 느낌조차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한다.
사랑이 생각을 초월하듯이,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한다.
그대는 다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깨달음을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그저 거기에 있다!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거의’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이 가능하다!
거의 깨달았다고?
이 말은 ‘이것은 99퍼센트 원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99퍼센트의 원이 있는가?
원은 완벽한 원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원이 아니다.
그것은 원이 아니라 다른 형상일 것이다.
‘99퍼센트의 원’이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나는 거의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 ‘거의’라는 말 자체가 그대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한 젊은 사내가 해변에서 유령과 섹스를 하고 있었다.
절정의 오르가즘에 이르렀을 때, 그 형체 없는 귀신이 말했다.

“내 생각에 나는 거의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대는 꿈을 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는 귀신과 섹스를 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꿈을 버려라.
그런 어리석은 표현을 버릴 수 있다면 그대는 깨달을 필요도 없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다. 아무도 깨달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장차 일어날 일이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자체다.
그 본성의 주변에 그대가 긁어모아둔 온갖 쓰레기를 버려라. 그것이 전부이다.



오쇼라즈니쉬의 <피타고라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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